신용회복경험담

2025.05.21 16:14

아이의 꿈을 지지했지만, 내 삶은 무너졌습니다. 그래도 다시 일어났습니다

  • 최고관리자 오래 전 2025.05.21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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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입부: 채무 발생 전의 일상적인 삶 (약 15%)

저는 충청도의 한 시골 마을에서 평생 농사만 지어온 평범한 농부입니다. 남편과 함께 30년 가까이 밭일하며 두 자녀를 서울로 대학까지 보냈죠. 자식들만 잘되면 뭐든지 감수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았고, 제 삶은 그저 검소하고 단순한 일상의 연속이었습니다.

둘째 아이가 고등학교 때부터 연예인이 되고 싶다고 했을 땐, 솔직히 처음엔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연습생 제의를 받았고, 서울에서 숙식하며 연습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선, 한 번쯤은 아이의 꿈을 밀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골 엄마지만, 내 아이가 후회 없이 꿈을 도록 돕고 싶었거든요.



 

2. 전개: 채무 발생과 악화 과정 (약 25%)

아이의 서울 생활비, 학원비, 오디션비용에 의상비까지... 처음엔 몇십만 원 단위였던 비용이, 어느 순간 월 150~200만 원씩 나가게 되었습니다. 농한기에는 소득이 없으니, 신용카드를 돌려썼고, 자식이니까 힘들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연습생 생활은 3년 만에 계약 종료로 끝났습니다. 아이는 심적으로도 많이 지쳐 있었고, 저는 그때까지 3천 9백만 원의 빚을 지게 되었더군요.

문제는 그 이후였습니다. 카드 연체가 시작되었고, 사정이 어려운 줄 알았던 가족에게도 1천만 원 이상을 빌렸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인간관계에도 금이 갔습니다. 시골의 폐쇄적인 분위기에서 ‘자식 연예인 시킨다고 빚졌대’라는 말이 돌아다니는 것도 참기 힘들었습니다.



 

3. 위기: 개인회생 결심까지의 상황 (약 20%)

결정적으로 개인회생을 결심한 건, 카드사에서 법적 절차를 밟겠다는 문서를 받았을 때입니다. 그날 저는 트랙터 옆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아이의 꿈을 밀어준 게 죄였는지 스스로를 자책했죠.

처음엔 개인회생이 부끄러운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남편도 “그 정도 돈쯤은 갚자” 했지만, 현실적으로 농사일만으로는 턱도 없었습니다. 결국 동네 복지센터를 통해 상담을 연결받았고, 전문가에게 “이건 재기 위한 제도지, 도망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듣고 마음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4. 해결: 개인회생 진행 과정 (약 25%)

상담부터 법원 인가까지는 약 3개월 정도 걸렸습니다. 정리된 채무는 카드사 1곳과 가족으로부터의 사채성 채무 포함 총 3,900만 원이었고, 법원에서는 제 소득과 나이 등을 고려해 월 18만 원씩 3년간 변제하는 안을 인가해주었습니다.

처음 법원에 출석했을 때 손이 덜덜 떨렸습니다. ‘내가 이 나이에 법정에 서다니…’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죠. 하지만 판사님은 조용하고 차분하게 절차를 설명해주셨고, 그 순간 조금 위로받는 느낌이었습니다.

농번기에는 새벽부터 나가 일하고, 농한기엔 마을 공동작업장에 나가며 소득을 채워나갔습니다. 남편도 묵묵히 지켜봐주었고, 자녀들도 오히려 “엄마 죄송해요. 저 때문에…”라며 눈물을 흘리더군요. 하지만 전 말했습니다. “엄마는 후회 안 해. 너도 최선을 다했으니까.”



 

5. 결말: 현재의 변화와 희망 (약 15%)

현재는 개인회생 1년 차에 접어들었고, 매달 성실히 납부 중입니다. 변제 시작 이후로는 신용카드는 사용할 수 없지만, 오히려 현금만 쓰는 습관이 생겨 재정 관리가 더 나아졌습니다.

아이도 지금은 새로운 일을 찾으며 성실히 살아가고 있고, 저도 내년까지 변제를 마치면 꼭 가족들과 제주도로 여행 한 번 가보는 게 목표입니다. ‘이 나이에 뭘 다시 시작하냐’는 말, 저는 믿지 않습니다. 삶은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혹시 저처럼 자식을 위해, 혹은 어떤 이유로든 빚을 지고 힘들어하는 분이 계시다면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부끄러운 게 아니라, 용기 있는 선택입니다. 개인회생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기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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